저희 아버지께서 2013년도 추수감사절날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래는 아버지의 장례예배를 위해 제가 쓴 추모문입니다. 저희 아버지 인생의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격려와 영감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희 아버지는 저에겐 언제나 큰 힘이 되고 영감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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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78년 전에 한국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떻게 다리가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다리가 매우 아프셨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엉덩이 절구관절이 없어 걸을 때마다 허벅지 뼈가 골반을 찔렀습니다. 옛날50년대 한국에서는 이것이 아마 당연한 놀림거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라면서 육체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16살 때에 본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아버지는 어린 세 형제들과 어머니를 보살폈습니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아버지는 위험을 무릎썼습니다. 가족의 재산을 다 팔아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부산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어린 형제들을 학교에 보내고 자신도 학교를 다니며 공부했습니다. 35세가 되어 결혼을 했을 때는 이미 교회 개척과 신학교 설립을 한 뒤였습니다.

3년뒤에 아버지는 미국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1972년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미국에 왔습니다. 저는 그 후 일년 뒤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의 이민 이야기는 남들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미국에 왔을 때 가진 돈이라고는 $640이 전부였고 $450로 차를 샀습니다. 크고 하얀 링컨 컨티넨털이었습니다. 남은 $90로는 방값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밥솟과 집안 살림을 조금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쌀 한포와 기꼬만 간장을 샀습니다. 다음 보름동안 끼니는 밥과 간장이었습니다. 마지막 $5 중 $3로 자동차 주유를 하고 $2은 교회에 헌금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병원에서 설거지하는 일을 구하였습니다. 환자들이 먹다 남은 밥을 집으로 가져와 가족의 끼니를 해결하였습니다. 일주일을 그렇게 일하고는 목사로써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일요일에 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고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경비원으로 일하게되었습니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수많은 계단을 오르고 내렸습니다. 하지만 또 일요일에 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고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 스튜디오에서 무대 장치 하는 사람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의 경험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일하였습니다. 커피 휴식도 거르며 일한 결과 그 곳의 매니저가 되어 괜찮은 수입을 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말로는 그 일이 워낙 힘든데다 편찮은 다리 때문에 아버지는 일이 끝나면 항상 고달프게 기어 들어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런 일을 하기위해 하나님의 부르심 받지 않았다는것을 아시고 그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 뒤 아버지는 교회를 개척하고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빌리 그래햄 목사님의 집회 통역을 하였습니다. 두 신학원의 총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신학 교과서도 출간하였습니다. 이 신학 교과서는 아직도 많은 신학원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항상 사람의 죽음 뒤,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일주일 동안 저는 아버지의 삶에 대해 생각하며 그동안 제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알지 못했지만 이제서야 깨닫게 된 아버지에 대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 아버지는 자기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일부로 자신이 더 나아보이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자신의 업적을 남들에게 알려야 될 필요를 못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제게 말하였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한 일 스스로가 그 가치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 아버지는 자신을 가여워하지 않았습니다. 불편한 다리, 16세에 맞은 아버지의 죽음, 경제적 어려움 등등 아버지가 자신을 가엽게 여길 수 있는 이유는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가 불평하는 것을 한번도 본 기억이 없습니다. 20년 전 갑자기 쓰러진 후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그리고 병상에 누워 있으며 4년간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도 아버지는 한번도 자신을 가여워하거나 이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 아버지는 공격 받을 때 복수를 추구하지 않고, 침묵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변호하는데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가 공격을 당하고 비난 받을때에 그에 대항하여 싸우기보다는 용서하고 참았습니다. 물론 그 안에서 상처도 받았지만 원한을 품지는 않았습니다.
  • 아버지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에 있어서는 환경의 방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육체적인 장애나, 경제적인 어려움때문에 포기할수 있었던 이유는 많았지만, 언제나 앞을 바라보고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달렸습니다. 지난 주중에 제가 아버지와 평생을 함께한 친구이자 동역자인 라보도 렙 박사님과 통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는 그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 아버지는 긍휼이 많았습니다. 아버지가 엄격하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압니다. 엄격하고 절제하고 열정적으로 생활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이 많은 업적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때에 따라 아버지는 화도 자주 내셨습니다. 최근에 저는 아버지께서 자동차 운전 중 화를 많이 내셨다는 사실을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제가 아버지의 아들인 것임은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아버지께서 수도 없이 남을 도오우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아버지가 자신의 선행에 대해 많이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시간이 흐른 후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내가 여기 있지 못했을 거다.” 그제서야 아버지가 얼마나 너그러웠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주위 사람들이 미국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집이 없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집을 몇달이 넘게 내어주고 집을 찾을 때까지 도와 주었습니다. 일이 없는 사람에게는 일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학교에 등록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자신도 가난하면서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도 내어 주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잠바를 내어준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몇년 후 그 사람이 저에게 와서 아버지의 보살핌에 대해 얘기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왜 하나님이 인생에 수많은 어려움을 줄까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이 모든 어려움을 통해 자신이 위에 설명한 성품을 배우게 되기 위해서 이다고 말할 것입니다. 자신이 어려움을 극복하였기 때문에 자신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많은 사람에게 조롱 당하였기 때문에 사역 중 받은 많은 모욕를 참을 수 있었고, 아버지를 일찍 잃으셨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었고, 배고픈 이민생활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남들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께 인생을 바쳤습니다. 그의 상처, 아픔, 기쁨, 승리,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 추모문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감사의 표현을 하고싶습니다. 아버지를 보살펴주어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쓰러진 후 20년동안 매일 한결같이 곁에 계셨고, 걸을 수 있게 옆에서 부축하여 주셨고, 옷을 입혀 주셨으며, 음식을 먹여주고 기도해주고 간호하셨습니다. 헌신이 무엇인지 제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엄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많이 보고싶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goodbye” 가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 곧 다시 보게 될 날을 기다립니다. 그 날은 아버지와 아들로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서 있을 것을 기대합니다.